보통 사람들이 나에게 고향이 어디냐고 물을때 나는 농담 반 진담반으로 실제적 고향은 서울이라고 하고 정신적 고향은 제주도라고 답한다. 어느덧 떠나온지 14년이 되가지만 제주도에서 보낸 아동기의 추억은 매번 아련하게 다가온다. 나에게 제주도는 하나의 놀이터이자 배움터였다.
초등학교 학교 내 보이 스카우트 활동은 아동기 특유의 놀러다니는 경험을 톡톡히 축적해 주었다. 특히 보이 스카우트 활동은 제주도라는 특수적 지리적 이점이 결합되어 육지의(?) 흉내내는 보이스카우트 활동과는 급이 달랐다. 그리고 그 활동 중 내 기억에서 선명하게 자리잡고 있는 기억은 바로 좁디 좁은 동굴일 것이다.
그 동굴은 흔히 관광지된 동굴과는 달랐다. 입구 부터가 달랐기 때문이다. 그건 동굴입구라기 보다는 메마른 우물입구라고 하는 말이 정확할 것이다. 아무런 표지조차도 없었고, 입구가 평지에 나 있었으며, 내려가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특이한 입구를 지나서는 좁디 좁은 통로가 이어졌다. 초등학생들이 엎드려 지나가기에도 좁은 통로는 10분간 이어졌고 동굴 끝에 도착해서야 학교 교실보다는 작은 공간이 나타났다.
축축하고 좁은 공간, 아무런 표지도 없는 입구를 가진 동굴. 도착 후 인솔 선생님의 설명이 시작되었다. 피난처. 그곳은 4.3 사건 당시 도민들이 학살을 피해 몸을 숨겼던 장소였던 곳이다. 주위를 둘러보니 앙상한 돼지 뼈들이 방치되고 있었다. 보존되어 있었다는 말은 절대 쓰지 못할것이다. 60년의 세월을 지나고도 남은 사람의 흔적을 말해주기 위해 보존되었기 보다 그저 흔적에 대해 신경 쓰지 못해 방치된것으로밖에 안보였기 때문이다.
무릇 사람의 그나큰 슬픔은 위로 받기 위해 많은 노력들이 이루어 진다. 그리고 잊혀지지 않기 위해 보존된다. 하지만 그곳은 그 위로조차 받지 못하고 이렇게 소수만이 찾아와 기억되고 있었을 뿐이었고, 보존되지 않고 방치되어졌다. 과연 그들의 절박함과 슬픔은 어디로 갔을까? 그리고 그들은 살아남았을까? 서글퍼지는 의문점은 동굴에서 메아리되어 올 뿐이었다.
나에게 슬픈 사실은 그 동굴을 다시는 찾지 못할거라는 점이다. 나의 기억은 흐릿해져 동굴에 대한 기억만이 남아 위치와 동굴 이름조차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14년이 지나 그나마 내가 지나간 이들에게 자그나마 위로를 줄수 있는건 14년이 지나도 나는 그 동굴의 존재를 기억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과연 그 동굴은 이름이 있었을까? 지금은 방치되어 지지 않고 보존되어지고 있을까?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기억되어지고 있을까? 그러기를 바란다. 그리고 나 자신도 이를 잊지 않기 위해 반추하며 이글을 쓴다. 잊지 않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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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초딩시절은 그냥 폐공장이나, 산능선 엄폐물(예비군 훈련용)를 몰래 탐험하던 기억밖에 없는데 (...)